
우리는 뛰고 숨고 맹목적으로 내벽을 쌓아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입니다. 이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항상 역효과를 낳습니다.
1989년, 세상은 우리 눈앞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들어본 적 없는 작가 Salman Rushdie가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블로우백은 입소문을 탔다. 에서와 마찬가지로 호스트를 거의 죽일 뻔했습니다.
당시 성인이라면 Salman Rushdie가 소설을 출판한 후 사탄의 구절,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당시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fatwa— 법적 판결 — 저자의 죽음을 요구하는 판결.
이 에세이에서 Jill은 몇 가지 통찰력을 공유합니다. 사탄의 구절, 그러나 저자에 대해 - 그의 회고록을 읽고 얻은, 조셉 안톤이 회고록은 수년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러슈디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루슈디의 글쓰기 옹호 사탄의 구절 지금까지는 다소 전설적입니다. 결국 그는 기본적으로 XNUMX년을 숨어서 살해당하는 것을 피하고 동시에 이 책을 방어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표현의 자유와 같은 것들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똑같이 중요한 기본 요소를 놓칠 수 있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살만 루슈디가 그토록 자극적인 이야기를 쓰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믿거 나 말거나, 아마도 깨닫지 못한 채 그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PART XNUMX: 땅의 위치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 미국에서도 우리는 언론의 자유를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보호하는 가장 중요한 헌법적 보장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유는 확실히 싸울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자유의 편에서 싸운다고 주장하면서도 사실은 스스로 감옥의 벽을 쌓는다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그 벽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 벽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요? 경로 작업 안내서에서 가르치듯이, 우리가 세상에 만들어내는 모든 것은 좋든 나쁘든 우리 안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창조물이 부정적이거나 파괴적일 때, 그것들은 항상 비진리와 연관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기 주도적 질문이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 속에 거짓이 숨어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비진리는 우리가 내벽을 쌓는 비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벽은 외부 세계에 불쾌한 전개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의식적인 의견, 생각, 감정이 무의식과 분리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우리 영혼에 벽이 생깁니다. 우리가 외부 물질 세계에 쌓은 벽은 실제로 이 내면의 벽보다 훨씬 더 쉽게 허물 수 있습니다.
"내벽의 이쪽에는 우리가 알고 마주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벽의 반대편에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모든 것들이 쌓여 있습니다. 여기에는 불쾌한 결점과 약점, 그리고 우리를 두렵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모든 것들이 모여 있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잘못된 결론을 내려 이 모든 것을 봉인합니다. 예를 들어, "내 자신에 대해 이런 걸 보면 내가 나쁘다는 걸 확신하게 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게 우리는 문을 잠그고 열쇠를 버립니다.
"그럼 이 벽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요?… 우리의 벽은 부분적으로는 잘못된 결론과 무지로 인해 효과가 없는 선의로 만들어질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벽에서 비겁함의 파편, 조급함, 교만, 그리고 자기 의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완벽에 도달하기를 바라며 이 안쪽 벽을 쌓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조급함은 드러납니다. 완벽하지 못한 부분들을 그 뒤에 쌓아 올려 완벽에 도달하려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해와 불화를 없애는 데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보다 벽을 쌓는 게 훨씬 쉽거든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그런 자기 솔직함은 내면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벽을 쌓는 재료 목록에 게으름도 추가해 봅시다. 사실, 이 모든 트렌드는 우리가 내면의 벽을 쌓는 데 사용하는 건축 자재입니다."
- 리빙 라이트, 19장: 내부의 벽 | 과연 벽은 어디에 있는 걸까?
In 조셉 안톤, Salman Rushdie는 그의 내벽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견해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탐험할 가치가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제한적이고 스스로 만든 벽은 인간 조건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분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우리가 여기 있는 주요 이유입니다.
풍경 이해하기
루슈디는 1989년 회고록에서 이란 최고 지도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맘은 집권 후 자신을 데려온 많은 사람들과 그가 싫어하는 모든 사람을 살해했습니다. 연합주의자, 페미니스트,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동성애자, 창녀, 그리고 자신의 전 부하들까지 말입니다. 그와 같은 이맘의 초상화가 있었습니다. 사탄의 구절, 이맘은 괴물이 되었고, 그의 거대한 입은 자신의 혁명을 먹어치웠습니다.
"진짜 이맘은 이웃 나라와 쓸데없는 전쟁을 벌이며 조국을 짓밟았고, 그 노인이 전쟁을 중단시키기도 전에 수십만 명의 젊은이들이, 수십만 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서문: 첫 번째 검은새, 11쪽)
Rushdie는 글을 쓰면서 이것이 1980년대 이란의 풍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탄의 구절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후 죽은 자들이 이맘에게 반기를 들었고, 그의 혁명은 인기를 잃었습니다. 그는 신자들을 규합할 방법이 필요했고, 책과 그 저자라는 형태로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죽어가는 이맘에게 필요한 악마였습니다." (서문: 최초의 검은새, 11쪽)
가장 큰 의문은 루슈디가 왜 자신을 그들의 "악마"로 내세웠는가 하는 것입니다. 뭐 그에게 그것을하도록 강요 했습니까? 인간은 종종 혼합된 동기의 가방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의 인생을 날려버릴 책을 쓰도록 부추기는 더 깊은 부분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말을 해도 괜찮습니까?
잠시 생각해 봅시다. 살만 루슈디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괜찮을까요? 제가 그의 이야기를 교육의 기회로 삼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그가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새롭거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공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 그는 성공적인 작가가 되면서 공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누군가의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해 주는 것은 일반적으로 좋지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작품을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그들이 스스로 발견할 준비가 되기 전에 우리가 보는 것을 먼저 말해버린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쓴맛을 안겨줄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공유하는 것은 제 개인적인 관점이며, 틀릴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그리고 많은 존중과 세심함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합시다.
XNUMX부: 부정적인 쾌락 이해하기
Pathwork Guide는 전체 퍼즐을 보면 모든 것이 이해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정확한 포인트를 말씀드릴 수 있어요 조셉 안톤 루슈디의 삶의 조각들이 하나로 뭉쳐지고 제게 의미가 생기기 시작한 순간이었습니다. 이 혼란의 시작과 함께 그가 아내 마리안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였습니다. 그가 글을 쓸 당시, 그들은 이미 헤어져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3인칭으로 자신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세요).
그는 마리안이 그리웠다. CIA 음모와 블랙 저널 이후, 그 모든 일이 벌어진 후 그녀에게 돌아가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음과 몸은 그녀를 그리워했다.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서로 다투었다. "잘 지내길 바란다"로 시작된 대화는 "죽기를 바란다"로 끝났다. 하지만 사랑, 그가 사랑이라고 무엇을 의미했든, 그녀가 사랑이라고 무엇을 의미했든, "사랑"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그들 사이에 맴돌았다. (4장: 사랑받고 싶어하는 함정, 251쪽)
Salman Rushdie와 Marianne 사이에 공중에 매달려있을 가능성이 더 큰 것은 Pathwork Guide가 부정적인 즐거움과 어린 시절 상처의 재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하기 전에 더 많은 이야기를 채우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부정적인 즐거움이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기회는 좋은데 Salman Rushdie도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투쟁의 비법
마리안과 결혼한 후, 러시디는 많은 친구들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몇 가지 거짓말을 들켰습니다. 러시디는 그녀가 종종 화가 난 것처럼 보였고,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마치 낯선 사람과 결혼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는 또한 이렇게 밝혔습니다. "1987년 11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그녀에게 결혼을 청했고, 두 사람 사이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서문: 첫 번째 검은새, 10페이지)
지금은 1989년 2월, 테헤란의 군중들은 눈을 찌푸린 루슈디의 얼굴 포스터를 들고 있었다. "발렌타인데이였지만, 그는 아내이자 미국 소설가인 마리앤 위긴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6일 전, 그녀는 결혼 생활이 불행하다고, '더 이상 그와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지 않다'고 그에게 말했다. 결혼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도 이미 그것이 실수였음을 알고 있었다." (프롤로그: 첫 번째 검은새, 3페이지)
이 투쟁의 레시피에 한 가지 더 추가해 보겠습니다. 책의 다른 부분에서 루슈디는 "어머니는 분노하고 실망한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와 수십 년간 결혼 생활을 하면서 기억 대신 '건망증'을 키웠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일어나 전날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아버지 역시 어려움에 대한 기억이 부족한 듯, 자신이 갈망하는 것만 기억하며 깨어났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4장: 사랑받고 싶어하는 함정, 251쪽)
그렇다면, 그게 그가 마리안을 그리워하고 그녀에게 돌아가고 싶어 한 이유일까요? 그가 마리안이 어떤 존재였는지 잊어버렸기 때문일까요? 그럴듯한 설명이지만, 그다지 설득력이 없습니다. 좀 더 말이 되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는 마리안이 자신의 힘겨웠던 과거와 잘 어울렸기 때문에 그녀에게 끌렸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그녀는 그의 부정적인 쾌락에 불을 지폈습니다.
부정적인 즐거움이란 무엇입니까?
생명의 직물을 통해 짜여진 것은 놀라운 힘을 지닌 생생한 물질입니다. 이 생명력에는 Pathwork Guide가 쾌락 원칙이라고 부르는 완전한 행복의 흐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내면의 치유 작업을 하면 할수록 이 생생한 생명력, 이 행복을 점점 더 많이 경험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온 우주와 조화를 이루며 진동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경험은 이 쾌락 원칙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우리 모두는 당신이 원한다면, 즐거움을 위해 미리 배선된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모든 부모가 불완전한 것처럼 우리 부모도 불완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그들의 사랑에서 오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지만 그들의 한계와 허물로 인해 고통도 겪었습니다.
아이가 어떤 종류의 잔혹함을 경험할 때마다, 아이의 쾌락 원칙은 그 잔혹함에 달라붙습니다. 그 선들은 아이가 경험하고 내면화한 잔혹함과 같은 정도로,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용접"됩니다. 그리고 잔혹함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점에 유의하세요. 적대감이나 공격성과 같은 노골적인 잔혹함은 더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연결되지 못해서 사랑을 주지 않는 것과 같은 은밀한 잔혹함도 마찬가지로 해롭습니다.
아이가 거부당했을 때 쾌락을 느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아이들은 그저 외상적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거부당하는 상황을 견딜 수 있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쾌락 원칙과 잔혹함이 결합되는 것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합니다.
부정적 쾌락은 잔혹함 앞에서 우리가 어쩌면 매우 강하게 "쾌락"을 느끼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양방향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즐거운 활동을 즐길 때 우리 자신의 잔혹함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타인에게 잔혹할 때, 우리는 쾌락의 연속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잔혹함에는 "활력"이 있고, 우리를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효과는 우리의 성인 관계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성숙한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어른이 되어서도 이루지 못한 깊은 갈망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면서 어린 시절의 상처를 재창조하는 데 평생을 보낼 것입니다.
우리는 왜 그런지 의식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엇갈린 어린 시절 경험이 이상적으로 어우러진 사람과 상황에 끌립니다. 부모의 어떤 면은 가장 부족했고, 다른 쪽 부모는 진정한 사랑과 애정을 주는 데 더 가까웠을 것입니다. 이제 어른이 된 우리는 어린 시절에 공명하는 특유의 잔혹함을 마주할 때마다 부정적인 쾌락을 자극하여 생명력을 되살립니다.
스토리텔링과의 불편한 관계
루슈디가 스토리텔링에 품은 애정의 원천은 부모님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유쾌하게 시작됩니다. "그는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그를 봄베이로 데려가 '이드 알 피트르'에 기도하게 했습니다. 이드가(Idgah, 이드가)를 하고, 이마를 맞대고, 책처럼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서 있는 등, 자신이 모르는 언어로 모르는 단어를 웅얼거렸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하는 대로 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집안이 아니었고 그런 의식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문이나 그 의미를 전혀 배우지 못했습니다." (프롤로그: 최초의 검은새, 8쪽)
루슈디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잠자리에 들 때 동방의 경이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그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들려주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만들고 새롭게 창조해냈습니다. 이런 이야기에 깊이 젖어 자라면서 두 가지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첫째,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병 속의 '진짜' 지니도, 날아다니는 양탄자도, 멋진 램프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진실이 말해 줄 수 없는 진실을 느끼고 알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야기는 모두 그의 것이었고, 그의 아버지 아니스와 다른 모든 사람의 것이었으며, 그의 것이었고, 그의 아버지처럼 모두 그의 것이었습니다. 밝은 이야기든 어두운 이야기든, 성스러운 이야기든 세속적인 이야기든, 그가 원할 때마다 바꾸고 새롭게 하고 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이야기였고, 웃고 기뻐하며 함께하고, 그 이야기들을 사랑함으로써 삶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 대가로 그 이야기들로부터 생명을 얻는 이야기였습니다. (1장: 역전된 파우스트 계약, 19쪽)
루슈디는 어머니 네긴 역시 이야기꾼이었다고 묘사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세계적인 가십가였습니다. 그리고 루슈디와 가십을 나누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맛있고 때로는 음란한 지역 뉴스는… 스캔들이라는 즙이 많은 금단의 열매와 함께했습니다." 그는 어머니에게 가십이 중독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어머니도 가십을 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스토리텔링과 어두운 반전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루슈디가 소설가이자 스토리텔러였던 마리앤과 결혼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리앤이 불안정한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잠시 후에 살펴보겠지만, 바로 이 점이 루슈디에게 마리앤이 완벽한 짝이 된 이유입니다.
부정적인 쾌락의 뿌리 찾기
루슈디의 젊은 시절에 있었던 비극적인 이야기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이 두 가지는 그의 부정적인 쾌락의 깊은 뿌리를 보여줍니다.
"아니스 아메드 루슈디는… 섬유 재벌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았는데, 그 재산을 탕진하고 탕진한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행복한 삶처럼 보일지 몰라도… 주말에 그들을 해변에 데려갔을 때, 그는 가는 길에는 활기차고 재밌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화를 냈습니다… 술에 취하면 그들을 향해 흉측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기괴하고 무서운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들은 그 자세에 공포를 느꼈고, 외부인은 그 모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얼굴을 찡그렸다'는 그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1장: 역전된 파우스트 계약, 20쪽)
그리고 "아니스는 1961년 1월, 열세 살 아들을 데리고 영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루슈디)가 럭비 스쿨에서 교육을 시작하기 전 일주일 정도 동안, 그들은 런던 마블 아치 근처 컴벌랜드 호텔에서 방을 같이 썼습니다. 낮에는 학교에서 요구하는 물품들을 사러 갔습니다… 밤이 되면 아니스는 술에 취해 새벽녘에 겁에 질린 아들을 흔들어 깨우고는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할 줄 모른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음란한 말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1장: 역파우스트 계약, 21쪽)
어린 시절 긍정적인 경험을 통해 우리의 생명력은 "예"를 "예"로 받아들이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러면 사랑, 친절, 또는 창의성과 같은 긍정적인 표현에도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선이 엇갈리게 되면, "아니오"라는 말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상황에 이끌리게 됩니다.
마리안과 함께한 그의 삶에 대한 묘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잘 지내길 바라며 시작한 대화는 결국 네가 죽기를 바라며 끝났다." 우리는 루슈디와 마리안, 그리고 그의 아버지 아니스의 관계를 연결하는 부정적인 쾌락의 밝은 실마리를 볼 수 있습니다.
XNUMX부: 내적 갈등의 발견
루슈디는 아버지에 대해 여러 가지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아니스는 하숙집 밖에서 아들의 사진을 찍었는데… 아들의 눈에 비친 슬픔을 보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에 가는 것이 슬퍼 보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사실 아들은 아버지가 떠나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래야 밤마다 욕설과 이유 없이 충혈된 눈의 분노를 잊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장: 파우스트적 계약의 역전, 21쪽)
또한, "...아마도 그가 아버지와 최대한 멀리 떨어져 살게 될 것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그들을 그곳에 머물게 될 것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에게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아니스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뭐라고,' 그는 소리쳤다. '친구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거야?'" (1장: 역전된 파우스트 계약, 21쪽)
인생은 혼합 가방
루슈디의 아버지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았습니다. 사탄의 구절 세상에 태어났지만, 루슈디는 아버지가 자신을 지지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생각과 본보기가 없었다면, 사실 그 소설은 결코 쓰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1장: 역전된 파우스트 계약, 22쪽)
아버지에 대한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아니스가 77세로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루슈디가 아버지와의 깊은 유대감을 경험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니스는 루슈디의 책을 하나하나 얼마나 꼼꼼히 읽었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아니스는 더 읽고 싶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버지는 평생의 절반을 표현하지 못했던 깊은 부성애를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Rushdie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은 혼합 가방이었습니다. 스토리텔링 기술에 대한 애정과 이야기를 어두운 것으로 왜곡하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지지하지 않는 댓글과 표현되지 않은 지지도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내면에 밝음과 어둠이 모두 있기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상충되는 경험은 인간 사이에서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묻힌 갈등을 볼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합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합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치유가 우리가 여기에 있는 모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루슈디의 경우, 그는 자신의 부모님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그들이 당신을 엿먹이는거야, 당신의 엄마와 아빠?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글쎄요,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또한 당신이 원하는 사람, 당신이 원하는 작가가 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1장: 역전된 파우스트 계약, 22쪽)
혹시, 참으로. 여러 면에서 재앙이 될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은 소설을 쓰기 위해 무대가 설정되었기 때문입니다.
XNUMX부: 이미지 찾기
저는 다른 글에서 Pathwork Guide에서 "이미지"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썼습니다. 간단히 말해, 이미지는 우리가 어린 시절에 삶에 대해 내리는 잘못된 결론입니다. 우리에게 이미지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확고한 이해입니다. 하지만 이미지는 당시 우리의 매우 제한된 관점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미지는 결코 진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미지는 우리가 세상에서 행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살 때 인생 이야기의 롤링 그림은 자유롭게 흐르고 살아 있습니다. 거짓이 있으면 스냅사진처럼 얼어붙는다. 이것이 가이드에서 이미지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정신의 바위처럼 행동합니다. 그것들의 경직되고 왜곡된 본성 때문에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미지는 거짓이기 때문에 우리 존재의 핵심에 있는 진실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미지는 우리를 신성한 자아에서 멀어지게 하고 자아에 의지해 살도록 강요합니다. 우리의 자아는 이 거대한 바위들이 가로막는 상황에서는 더 높은 자아를 놓아주고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거짓된 숨겨진 신념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우리는 반복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더욱 고통스러운 삶의 경험을 만듭니다. 우리의 내적 갈등은 항상 세상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볼 수 있게 하여 그것들을 마주하고 변형시킬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외부 갈등은 결코 우리 문제의 진정한 원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지가 점점 더 많은 고통을 만드는 방법
읽을 필요도 없다 조셉 안톤 살만 루슈디에게도 이미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이고, 모든 인간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 특히 한 가지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예를 들어, "나는 불안정한 사람들에게 거부당한다." 또는 "나는 불안정한 사람들에게 학대당한다."와 같은 이미지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루슈디와 그의 아버지의 관계에 대한 그러한 믿음의 기원을 이 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리안과의 결혼 생활에서도, 그리고 그의 책에 대한 반응에서도 그 믿음을 확연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탄의 구절.
결국, 저자와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은 틀림없이 불안정한 세계 지도자와 그 지도자 뒤에 줄을 선 많은 사람들로부터 거부와 학대를 경험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 모두는 놀라운 창조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바탕으로 창조합니다.
PART XNUMX: 인생을 바꾸는 분할의 영향
루슈디의 작가 경력은 매우 느리게 시작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의 첫 번째 책 쓰기 시도는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해 뭔가 잘못되었거나 오해된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미 깨닫기 시작했습니다."(제1장: 역전된 파우스트 계약, 53쪽)
내면의 분열은 이런 속성을 지닙니다. 우리는 내면에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결국 분열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 상반된 믿음을 동시에 믿는 것입니다. 분열을 화해시키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상위 자아가 가질 수 있는 진실된 반대 개념과는 달리, 분열의 두 반쪽은 모두 거짓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슈디는 자신의 감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삶의 모습이 왜 바뀌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불안한 일이었다. 그는 종종 무의미하고, 심지어 부조리하다고 느꼈다. 그는 영국인들 사이에서 런던에서 삶을 꾸려온 봄베이 출신이었지만, 종종 이중적인 소속감에 시달렸다… 이주한 자아는 필연적으로 동질성을 잃고 이질화되었다… 평균 이상으로 뒤섞였다. (제1장: 역전된 파우스트 계약, 53쪽)
불안은 내면의 분열을 가리킨다
인도의 고향을 떠나 영국 기숙학교에 가는 것에 대해 루시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아버지에게서 돌아서서 영국 생활에 뛰어들었을 때, 죄는 사라졌습니다. 외래성 그에게 가장 먼저 분명해진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자신을 누구의 타자(他者)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럭비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그는 그곳에서 얻은 교훈을 결코 잊지 않았다. 바로, 당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을 것이고, 그들에게 당신은 마치 작은 녹색 인간이나 외계에서 온 슬라임처럼 이질적으로 보일 것이며, 그들의 마음을 바꾸려고 애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1장: 역전된 파우스트적 계약, 26쪽)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960년대 초 영국의 한 기숙학교에서 그는 세 가지 큰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그중 두 가지만 저지르면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실수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외국인인 것, 영리한 것, 그리고 게임을 못하는 것… 그는 세 가지 실수를 모두 저질렀습니다. 그는 외국인이었고, 영리했고,운동가 다운. 그 결과, 그의 세월은 대부분 불행했습니다…"(제1장: 역전된 파우스트 계약, 27쪽)
루슈디는 영국 기숙학교에 간 여러 가지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13살 때 자신이 내린 이 선택에 대해 의아해했습니다. 그가 언급하지 않은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그의 내면의 분열 때문이었고, 그 분열은 그의 삶에서 표출되었습니다.
외부 변화가 내부 혼란을 고칠 수 있습니까?
Rugby School에 있는 동안 Rushdie(인도에서 영국의 기숙 학교에 다니는 소년)는 적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쓰고 이해하는 규칙을 배웠고 이를 따랐습니다. 예를 들어, 주머니에 양손을 넣는 것은 규칙에 위배됩니다.
하지만 그는 작은 서재로 돌아와 쓴 에세이가 갈기갈기 찢어진 것을 여러 번 발견했습니다. 누군가 그의 방 벽에 "Wogs go home"이라고 쓴 적도 있었습니다. 또 한 번은 그레이비 소스와 양파가 가득 든 양동이가 벽에 쏟아졌습니다. 학교 측은 그에게 피해 보상을 요구했고, 그렇지 않으면 졸업을 못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부모님을 포함해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이들처럼 행동하고 함께하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학교에서는 전혀 몰랐던 삶의 교훈을 배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럭비 학교를 졸업했을 때 부모님은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항공료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1장: 파우스트적 계약 역전, 47쪽)
그는 아버지의 모교인 케임브리지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케임브리지는 럭비가 입힌 상처를 대부분 치유해 주었고, 그에게 훨씬 더 매력적인 다른 영국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그곳에서 그는 쉽게 집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1장: 역전된 파우스트 계약, 36쪽)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요? 다른 학교로 전학하면 내면의 갈등이 해소될 수 있을까요? "후년에 그는 케임브리지 시절의 행복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고, 방에 혼자 앉아 울부짖던 외로움의 시간을 잊기로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1장: 역전된 파우스트 계약, 37쪽)
그의 어머니가 시도했던 것처럼 의도적으로 잊는 것이 정말 효과가 있을까요? 아니면 그저 우리 자신을 잊게 만드는 걸까요? 결국, 우리 내면에서 진정한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찾는 것을 잊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분열을 말하고 치유하기
우리의 이미지를 표현할 적절한 단어를 찾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우리는 내면의 분열에 목소리를 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둘 다 사실이라고 믿는 정반대의 믿음은 무엇일까요? 보통 한 면은 어머니에게서, 다른 한 면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습니다. 루슈디의 경우, 아버지의 영향이 어머니보다 훨씬 컸던 것 같습니다. 이는 삶의 허용적인 측면을 크게 차단하는 내면의 불균형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루슈디의 이별을 제가 해석한다면, 아마 이렇게 될 겁니다. "여기서 평화를 찾을 수 없어요. 집에 가서 평화를 찾을 수도 없고요." 아니면 "여기서 거부당하는 게 고통스럽고, 다른 곳에서 거부당하는 게 고통스러워요." 어느 쪽이든, 그런 이별은 갈 곳도, 집처럼 편안할 곳도 없는 삶의 조건을 만들어낼지도 모릅니다.
분열을 치유하려면 반대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아 중심적인 삶에서 더 높은 자아를 중심으로 하는 삶으로의 전환이 필수적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분열의 양쪽에 숨겨진 허위를 밝혀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진실을 파헤쳐 우리 영혼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탐구해야 할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문제의 진실은 무엇입니까? 이 경우에는 "내 안에서 진정한 안식처를 찾으면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거야."와 같은 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안식처를 찾으려면 길을 가로막는 거짓과 잔여 고통이라는 장애물, 즉 바위들을 치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바로 우리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뿌리에 도달하기
고통스러운 경험들이 상처를 만들었다고 믿으며, 우리 삶의 이야기를 고난의 렌즈를 통해 바라보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 그 상처들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삶은 그 반대로 돌아갑니다. 즉, 우리의 상처, 즉 내면의 이미지와 분열이 고통스러운 경험을 야기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그 상처들을 표면화시키는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더 즐거운 삶을 살고 싶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치유해야 합니다.
이미지나 분열과 같은 깊이 뿌리박힌 모든 믿음은 우리가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던 전생에서 비롯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더 쉽게 깨닫고 스스로를 바로잡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생각에 깊이 빠져들어 똑같은 고통스러운 패턴을 여러 생에 걸쳐 반복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들을 파헤칠 준비가 되었다면, 이번 생에 드러난 패턴들을 살펴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만들고 있습니까?
의 경우 사탄의 구절루슈디는 그의 작품으로 상당한 문학적 찬사를 받았습니다. 비평가들은 스토리라인과 서브플롯을 엮어내는 그의 능력을 칭찬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풍부한 스토리텔링의 흐름은 이슬람과 그 지도자들을 향한 잔혹함이라는 강렬한 실마리로 엮여 있었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만들어내는 패턴들을 살펴봄으로써만 우리는 숨겨진 잘못된 믿음을 표면화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우리 각자가 내면의 탐구를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대신하여 이를 해줄 수 없고, 또 해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숨겨진 잘못된 믿음을 파악하고 나면, 다음 단계, 어쩌면 가장 어려운 단계 중 하나는 질문을 뒤집어서 이렇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 상처를 주는 거짓은 내 안에 어떻게 살고 있는가? 루슈디의 이미지를 예로 들어, 이렇게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어떻게 사람들을 거부하고 학대하는가? 나는 어디에서 어떻게 불안정한가? 나는 어떻게 내 잔인함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가?
아마도 그의 창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탄의 구절. Rushdie는 무엇을 거부 했습니까? 그는 누구를 학대하고 있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까? 그 자신, 집이라고 부를 곳도 없고 평안함을 느낄 곳도 없이 XNUMX년을 살았습니다. 그에 대한 위협은 매우 심각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찾는 것은 그러한 내면의 깊이로 잠수하는 것뿐입니다.
중간 지점 찾기
자가 치유는 내부 작업이지만 외부 세계에서 보이는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행동을 취하는 것도 이치에 맞습니다. 더 큰 현실에서 인생은 한 가지 또는 다른 것—이원성에서 보이는 것처럼—그러나 둘다. 그리고 우리는 현실의 또 다른 수준, 즉 통일의 수준에 들어가야만 이 두 가지/그리고 생활 방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위 자아가 거주하는 곳입니다.
자아는 원래 이원성 차원에서만 존재합니다. 따라서 자아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각자 어떤 말을 탈지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단 한 마리의 말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자아는 반대 의견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거나, 아니면 자유를 얻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자유를 가져야 한다"의 반대는 "나는 자유가 없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은 자유를 가져야 한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이야기를 바꿔놓습니다.
Pathwork Guide의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에게 항상 중간 지점을 찾으라고 조언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자신을 표현할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큰 집단, 즉 더 큰 세상의 일부인 공동체에 살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권리 또한 고려해야 합니다.
반쪽 진실은 감옥의 벽을 만든다
언론의 자유와 관련하여, 적어도 미국에서는, 개인의 표현의 자유는 붐비는 극장에서 누군가 아무 이유 없이 "불이야!"라고 소리치려고 할 때에만 제한됩니다. 이러한 판결은 기본적으로 다른 시민의 저차원적 자아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도록 설계된 법 체계에서 비롯됩니다.
만약 사람들에게 하위 자아가 없다면, 즉 내면에 어둠이 없다면, 그런 외적인 법칙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상위 자아, 즉 내면의 빛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일단 우리가 가내면의 장애물을 치우고, 자아를 내려놓고, 내면의 빛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우리는 이미 신성한 연결 속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다치게 하면 나 자신을 다치게 하고, 내가 나 자신을 다치게 하면 당신을 다치게 한다는 것을.
다시 말해, 우리가 더 진정한 통합의 현실, 즉 더 높은 자아로부터 살아가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을 때, 한 사람의 가장 큰 이익이 다른 사람의 이익과 충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유에 대한 우리의 동기가 반쪽짜리 진실, 즉 우리 개인의 자유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자유라는 믿음에 기반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은 감옥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루슈디의 경우, 자신의 표현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그의 강력한 추진력은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침해했습니다. 사탄의 구절 그는 자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했습니다. 그의 전처와 아들, 특별 지부 보호관찰관들, 그리고 그의 책 출판 및 판매에 관여한 사람들의 생명도 위협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책 번역에 관련된 사람들을 공격하고 때로는 살해했습니다. 그의 발행인에게 폭탄 테러와 건물 대피가 있었습니다. 여러 서점과 백화점에서 실제로 몇 개의 폭탄이 폭발했습니다. 사탄의 구절. 그리고 수많은 살해 위협이 있었습니다. "우린 당신이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습니다. 당신 자녀들이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3장: Year Zero, 148쪽)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만의 거짓말을 덧붙이며 이 불길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루슈디가 영국을 히틀러의 독일에 비유했다는 말처럼요. "사랑받지 못하는 책의 저자는 텔레비전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어디서? 몇 페이지에? 어디서 그런 말을 했는지 보여주세요.' (3장: Year Zero, 152쪽)
더욱이, 그가 살아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그를 죽이려는 사람이 정말 있는지 더 궁금해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는 왜 왕처럼 대우받는가? "그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보호받는 기분이 영화 스타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기가 어려웠습니다. 마치 감옥에 갇힌 것 같았죠." (3장: Year Zero, 178쪽)
루슈디는 경호원의 요청으로 조셉 안톤이라는 가명을 사용했고, 경호원은 그를 11년 동안 조라고 불렀습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루슈디는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오직 조셉 안톤만이 존재했고, 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3장: 0년, 176쪽)
어떤 면에서는 우리 모두가 이런 행동을 합니다. 도망치고 숨으며,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거라고 바라는 내면의 벽을 맹목적으로 쌓습니다. 이해할 만하지만, 항상 역효과를 낳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린 시절에 내면화된 것에 기반한 우리만의 독특한 잔혹함을 다시 세상에 드러내는데, 종종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하게 됩니다.
이러한 악순환은 여러 세대에 걸쳐 반복되며, 절망을 안겨주고 진실되고 사랑스러운 경험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이 모든 것을 인정하기는 어렵기에, 우리는 삶의 모든 것을 우리 자신 외부의 무언가 탓으로 돌리며 덮어둡니다.
치유의 작업에는 과거의 수치심과 비난을 없애고 문제의 근원을 풀기 시작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의 길입니다.
Salman Rushdie, 나는 당신이 이 생애 동안 맡은 임무의 크기를 존경합니다. 그리고 제가 당신의 경험을 자기 치유의 일을 하는 것에 대해 가르치는 데 사용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질 로리

참고: 이 에세이의 참고 문헌 출처는 조셉 안톤: 회고록 Penguin Random House LLC의 각인 및 부서인 Random House가 미국에서 2012년에 출판한 Salman Rushdie가 iPad용 Kindle 버전 6.63에서 읽었습니다. 허가를 받아 재인쇄했습니다.


